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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약속했잖아요.

라일락 안개 2022. 8. 15. 22:39








옷장 안에 틀어박혀있던 하늘색 후드를 꺼내입었다.
가슴엔 만타가오리가 그려져 있고 소매는 얼룩덜룩해,
아무리 찬물에 빨아도 결국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남은 옷이었다. 어디 밖에 나가 입기도, 그렇다고 집에서 입고 있기도 애매해서 옷장 구석에 고이 모셔둔 애물단지다.

바지는 밑에 같이 넣어둔 검은색 츄리닝, 신발도 신발장에서 오랜만에 꺼낸 흰색 운동화.
짧게 집안을 둘러본 뒤 속으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누구도 듣지 않는 인사를 하며 현관을 열었다.

주차장의 물곰팡이 냄새가 괜히 마음을 뒤숭숭하게 해서 조수석에 챙겨온 것들을 잘 정리해 두고 차에 올라탔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찍기도 조금 귀찮아진 목적지를 찾아가는 동안 라디오를 틀어 적적한 차 안을 환기시켜 본다. 마침 흘러나오는 오늘의 추천곡. 하지만 노래나 라디오DJ의 목소리가 귀에 잘 박히지는 않았다.

바다는 꼭 동해 바다. 서해는 뻘 때문인지 물이 좀 탁하고 남해는 너무 멀었다. 터널을 여러개 뚫고 가야 만나는 해변은 사람들이 많은 해수욕장은 아니라 조용히 홀로 있을 수 있어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곳이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있던 노트와 하얀색 국화 꽃다발을 들고 해변 옆 텅 빈 부둣가로 가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맞아본다.
꽃다발을 묶은 끈과 종이 포장지를 풀어 작은 잎파리와 꽃대만 남은 국화들을 다시 파도에 떠밀려 오지 않게 멀리멀리 던지니 꽃잎 몇 개가 흰 물거품과 섞여 돌아온다.

부둣가에 쭈그리고 앉아
바람을 피해 조심히 펼친 노트에는
당신들의 이름과, 죽었던 날짜와, 시간과, 죽은 이유가

슬프게도 빼곡히 적혀있었다.

글씨는 지금과 다름없이 단정하지만 울면서 썼는지 눈물자국에 종이는 우글거리고 잉크는 번져있다.

한 페이지에는 누군가 죽어가는 사진이
한 페이지에는 이미 죽은 사진이
한 페이지에는 사진 마저 없었다.

파도 치는 소리가 가슴안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이면 다 읽은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해변으로 걸어간다. 노트는 후드 앞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는 벗어 손에 든 채 뒷짐을 지며 파도가 밀려오는 곳을 맨발로 산책한다.

"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텐데.."

결국 혼자 오게 되었다

"다들 푸른색이 엄청 보고 싶었잖아요."

파란거라곤 녹색 칠판이 다 였지 아마

"그래서 바다에 가자고 한 사람이 많았나 봐요."

혹시 산이 더 좋은 사람도 있었을까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못 알아보진 않을까 해서 매번 같은 옷도 입고 오는데

"나는 엄청 보고 싶어요."

그래서 가끔은 꿈에도 나와요

"겨우 꽃만 뿌려주고 가서 미안해요."

다들 좋아하는거 뭐 있냐고 한 번씩 물어볼 걸

"그래도 나,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나한테 살아달라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내가 살려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나중엔 웃을 수 있는 곳에서 만나요..

텅 빈 집에 다시 돌아오면 늘 해가 지고 있다. 방 안 책상서랍 마지막 칸에 노트를 깊숙히 봉인해두고, 옷과 신발은 꺼낼때 모습 그대로 먼지만 털어 다시 제자리에 정리해 두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와, 커피와 함께 소파에 앉아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면, 오늘 갔던 바다는 마치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