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건물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듯, 바닥엔 아직 먼지가 날리고 가구 하나 없이 깨끗한 빈 공간에 햇빛이 부서져 들어온다. 창문에 새겨진 마법진이 천천히 발동 되고 방안을 채우는 빛이 다르게 바뀌었을 때 이안은 자신이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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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초상화를 지나치며 황궁 이곳 저곳을 쏘다닌다. 시종들이 열심히 아이를 찾는 듯 하지만, 뭐에 단단히 뿔이라도 났는지 붉은 커튼 뒤에 숨어 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황제가 어쩌다 한 번씩 찾아가던 비밀장소에 발을 들였다.
책장과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방은 창문을 가운데 두고 대칭으로 꾸며져 있었고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이 조명을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원래는 들어오지 말아야 하지만, 종종 숨어들면 평범한 시종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찾는 장소였다.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좋아하는 동화책을 고르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흠칫 몸을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창문에서 햇빛이 아닌 빛이 새어나오자 아이는 들고있던 책을 던지며 황급히 방을 벗어났고 빛으로 둘러싸인 인영은 뒤늦게 그 뒷모습을 보며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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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이안은 은빛의 뒷통수를 보고 홀린 듯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돌아온 별관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듯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떠났던 시간에 그대로 멈춰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바리엘로 돌아갔던 이안은 이곳에 있던 시간 만큼 똑같은 시간이 흐른 100년 뒤 바리엘을 보고 겸허히 그 왕관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바리엘의 정체성은 황제가 아닌 국민들이었으며 그들은 이미 100년 그 이후의 바리엘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안 베로시온이 아닌 이안 히엘로인 상태로 보내진 것도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달라진 모습으로 황제라 우겨봤자 누가 믿어주겠는가.
시간을 여행했던 그 마법은 마치 이안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려주려던 것 같았다. 홀로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무게를 홀가분히 내려놓는 계기이기도 했다. 황제가 없는 바리엘을 꿈 꿔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안이 믿는 바리엘은 황족이 있냐 없냐에 흔들릴 만큼 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안은 익숙한 듯 낯선 복도로 나와 아이가 뛰어간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 앞에서 나는 발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다만 약간의 기시감과 함께 아이를 잡아세우고 보니 그는 이안이 생각한 사람, 진 베로시온이 아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흉터 자국이 자신이 알 던 황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진과 너무나도 빼닮았으나 조금은 다른 이목구비에 이안은 순간 아르센이 돌아왔나 싶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이 생겼던 아르센과 달리 아이는 그저 닮았다로 정의되었다. 바르게 말하자면 머리와 눈 색이 모두 쏙 빼닮은게 마치..
"이안.. 경."
"....."
고개가 오래된 톱니바퀴 마냥 느리게 돌아갔다.
그곳엔 황제 진 베로시온이 이안이 알던 초상화 속 모습, 그보다 더 황제 같은 모습으로 이안을 맞이하고 있었다.